민선6기

풍경이 있는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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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이 있는 여행

다랭이논.

한 뼘의 땅에서도 농부는 꿈을 꾼다.

남해 바다는 어부에게 은빛 멸치를 선물하고,

해변을 은빛 모래로 빚어 청춘을 춤추게 한다.

금산을 둘러싼 바위들이 잠에서 깨어나면

남해는 기지개를 펴며 지난 밤 꿈을 떠올린다.

경부고속도로에서 대전 통영 중부고속도로와 남해고속도로를 거치면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큰 섬 남해에 이른다.

남해로 들어가는 관문인 남해대교.

1973년 준공당시 화제를 불러 모았던 한국 최초의 현수교다.

남해 여행은 상주은모래비치에서 시작된다.

은가루를 뿌려 놓은듯한 고은 백사장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 은모래비치.

잔잔한 바다와 고은 모래가 경쟁하듯 은빛으로 반짝인다.

들뜬 마음으로 바닷가로 내려가 본다.

나는 어떻게 처음 바다를 만났을까?

바다는 내가 자라온 모습들을 모두 기억하고 있을까?

바다는 누구에게나 즐거운 놀이터다.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짖꿎은 모래 장난을 한다.

청년들의 웃음소리가 바다처럼 푸르다.

해수욕장 한쪽 끝에 유람선 선착장이 있다.

남해의 바다 풍경을 둘러보기 위해 유람선을 탔다.

유람선은 하루에 세 번 운행되는데, 주말이라 관광객들이 많다.

파도와 세월이 깎아놓은 풍경들.

십분 정도 지나자, 한려수도 4대 해안절경중 하나인 비룡계곡에 도착했다.

남해 용왕이 하늘로 올라가면서 만들어졌다는 기암괴석이 장관이다.

다시 유람선이 움직이고 아름다운 풍경이 이어진다.

상주은모래비치 뒤쪽으로 한려수도국립공원의 유일한 산악공원인 남해금산이 보인다.

금산은 이성계가 백일기도 끝에 조선왕조를 개국하게 되었다는 영험한 산이다.

한참을 올라가니, 장군의 모습을 닮았다는 장군암이 나타났다.

장군암은 오래된 송악 줄기에 덮여있어 그 위엄을 더한다.

금산의 관문인 쌍홍문.

기묘한 자연석굴은 남해금산이 예사롭지 않음을 느끼게 한다.

드디어 기암절벽 사이로 보리암이 나타났다.

보리암은 신라 신문왕때 원효대사가 세웠다는 구찰로 우리나라 3대 기도도량중 하나이다.

안타깝게도 당시의 모습을 찾을 수는 없지만 절 주변의 기기묘묘한 바위들이 마음을 경건하게 만든다.

남해금산의 정상으로 향했다.

정상에 오르자, 발 아래로 아름다운 풍경이 꿈처럼 펼쳐진다.

금산을 떠나 미륵이 도운 항구라는 뜻의 미조항으로 갔다.

항구 바깥쪽에서 어선들이 모여 그날 잡은 멸치를 그물에서 털어낸다.

멸치는 남해의 대표적인 특산물이다.

작업이 끝나면 배들이 수협 위판장이 있는 안쪽 항구로 들어온다.

배에는 멸치 상자가 가득 실려 있다.

멸치 상자는 위판장으로 보내기 위해 리어카에 실려진다.

그래도 어부는 바다를 탓하지 않는다.

멸치 상자를 위판장으로 다 옮기면 경매가 시작된다.

경매는 멸치잡이배가 들어올 때 마다 그때그때 이루어진다.

순식간에 최고가를 써낸 경매인에게 멸치가 낙찰됐다.

한쪽에선 즉석에서 소금에 절인 멸치를 작은 단위로 판다.

위판이 끝나면 항구에 갈매기들이 마무리 청소를 한다.

그리고 내일의 풍어를 꿈꾸며 배가 돌아간다.

남해는 우리나라 섬 중에서 가장 산이 많기 때문에 농경지가 귀하다.

바닷가 비탈 밭에선 아직도 소를 이용해 밭을 가는 곳이 있다.

쟁기와 소 그리고 농부.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우리의 고향의 풍경이다.

다른 밭에선 연세가 높으신 노부부가 힘들게 밭을 간다.

이젠 일을 놓으셔도 좋으련만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자식의 성공을 평생의 꿈으로 살아온 할아버지. 우리 아버지 세대의 초상이다.

밭가는 소도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는 가천 다랭이 마을로 향했다.

바다와 맞닿은 45도 경사에 가파른 비탈에 돌을 쌓아 만든 계단식 논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이곳에선 한 뼘의 논이라도 축복이다.

자그마한 밭 하나하나 마다 정성스런 농부의 손길이 가득하다.

육백 개가 넘는 이 다랭이 논들에는 얼마나 많은 땀과 꿈이 엉겨있을까?

다랭이논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곧바로 바다와 만나게 된다.

바닷가 근처에는 허브를 재배하는 다랭이 밭들도 볼 수 있다.

한창 예쁜 꽃들이 피어 바다와 어우러진다.

남해는 구운몽을 쓴 서포 김만중이 유배 되었다 병사한 곳이다.

김만중이 마지막을 보냈다고 전해지는 노도에 가기위해 배를 빌려 탔다.

벽련마을에서 배로 십분 쯤 가면 노도에 닿는다.

노도는 인구가 스무 명이 채 안 되는 작은 섬마을 이다.

동네 어귀에서 마을 할머니들이 이방인들을 반긴다.

김만중이 살았다고 알려진 집터에는 초가집을 복원해 놓았다.

그가 노도에서 죽었다는 역사적 기록은 아직 없다. 다만 이야기로만 전한다.

김만중의 노도 생활은 전설과 역사 사이에 있다.

그의 소설 구운몽이 꿈과 현실 사이에 있듯이...

노도를 넘어 앵강만으로 해가 진다.

서포 김만중의 이루지 못한 꿈과 함께 아홉 무리의 구름 속으로 해가 진다.

남해군을 이루는 두 개의 큰 섬.

남해도와 창선도 사이에 지족해협이 있다.

이곳에선 빠른 물살을 이용한 원시어장인 죽방렴으로 물고기를 잡는다.

물살이 빠른 썰물 때면 힘이 빠진 물고기들이 말뚝 밖으로 빠져 나가지 못하고 원통 모양의 대나무 발에 갇히게 된다. 그리고 물이 빠지고 나면 갇혀있는 물고기들을 건져 내는 것이다.

한쪽 편에 죽방렴을 가까이 관찰할 수 있게 다리 모양의 전망대를 만들어 놓았다.

원통 속을 내려다보니 운이 없는 몇 마리의 물고기들이 보인다.

고기를 떼로 잡는 그물질이 아닌, 잡을 만큼만 잡는 자연스런 고기잡이 방식이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이곳 죽방렴에서 주로 잡히는 멸치는 최고의 횟감으로 꼽힌다.

나는 근처의 소문난 멸치회 식당을 찾았다.

식당 안은 점심시간이 지났는데도 손님들이 붐빈다.

나도 멸치회를 한번 먹어봤다.

상큼하게 씹히는 맛이 일품이다.

한쪽 벽에 빽빽이 붙어있는 손님들의 찬사가 무색하지 않다.

물건리 뒷산 중턱엔 이국적인 풍광의 독일 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독일마을은 6,70년대 독일에 파견된 광부, 간호사 등 독일교포들의 국내 정착을 위해 남해군에서 조성한 마을이다.

마을 조성 초기에 이곳에 온 우춘자씨의 집을 찾았다.

우춘자씨도 1971년에 간호사로 독일에 갔다가 32년 만에 돌아왔다.

우춘자씨 부부는 모든 건축 재료를 독일에서 가져와 이집을 지었다고 한다.

실내 구석구석이 독일식으로 꾸며져 있다.

2층 발코니에선 물건리 바다가 시원하게 내다보인다.

부부와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

이곳에 집을 짓고 산지 벌써 7년.

부부는 이제 남해사람이 다 되었다.

남해의 독일마을.

청춘과 황혼.

이곳에선 시간도 공간도 꿈처럼 뒤섞인다.

우춘자씨는 정원 구석 텃밭에서 어린 시절 자신의 모습을 본다.

독일마을 앞 물건리 바닷가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숲이 있다.

약 350여 년 전, 바람과 파도의 피해를 막기 위해 조성된 방조어부림이다.

숲에 들어서자, 만 그루가 넘는 나무들과 아련한 파도소리가 여행의 피로를 한꺼번에 씻어준다.

남해여행의 마지막 풍경은 남해군과 사천시를 잇는 창선삼천포대교다.

다리를 제대로 보기 위해 세 개의 징검다리 섬 중 하나인 초양도에 갔다.

석별의 정을 나누고자 함인지 남해군 쪽으로 석양이 진다.

보석 같은 남해여행의 기억들이 금빛 바다를 배경으로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간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창선삼천포대교 쪽으로 발길을 돌린다.

어두움이 내리면서 다리에 조명이 하나둘씩 들어온다.

별빛처럼 빛나는 다리를 보면서 남해는 또 무슨 꿈을 꿀까...




2011-01-12